항주는 상해에서 남서쪽으로 약150km에 위치. 절강성(浙江省)의 성도.
589년 수양제 시절, 북경과 항주를 잇는 경항대운하(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개통되면서 강남의 물산이 모이는 교역장으로 처음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9~10세기에는 오(吳)와 월(越), 12~13세기에는 남송의 도읍이 되기도 했다. 13세기말에는 인구가 100만에 달할 정도로 대도시로 성장하였는데 당시 화려하고 번영된 도시의 모습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지상의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201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서호(씨후;西湖)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옛날부터 백거이와 소동파같은 시인들에 의해 칭송되어져왔다.
춘추시대 미녀 '서시'(西施)의 자태에서 이름을 따온 서호는 항주의 랜드마크.
단교잔설(斷橋殘雪)
백제의 북단에 걸려있는 이 돌다리는 '서호십경'(西湖十景)의 대표적인 경승지
다리의 중앙에 쌓인 잔설이 녹으면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해서 이런 이름이 붙게된 것.
'서호십경'을 알리는 단교잔설의 비석
옆에는 서호를 좋아해 몇번이나 순행을 내려왔던 청나라 강희제의 친필 비석이 서있다.
단교잔설 입구에 있는 장경국(蔣經國) 고택.
1930년대 지어진 2동짜리 벽돌조 2층주택으로 초대 대만 총통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항일전쟁 승리후 가족과 함게 살았던 고택은 현재 맥도날드로 사용중.
서호 북안에 자리한 높이 200여m의 보석산(寶石山)은 서호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
보석산정에서 본 서호와 백제의 모습
서호 북쪽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백제'(白堤)는 동쪽의 단교부터 서쪽의 금대교(錦帶橋)까지 약1km 길이의 제방.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만든 제방이라는 의미로 '백제'라고 불리우지만, 실제 그가 항주장관으로 부임하던 시기에 만든 제방은 다른 곳이었으며 현재는 남아있지도 않다. 그러나 항주사람들은 대시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백제'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보석산정에서 본 항주시내와 보숙탑
보석산 정상부를 이루고 있는 암석에는 산화철이 함유되어있어서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빛난다하여 '보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보석산 일대에는 산책로가 정비되어있다.
보숙산 정상부에 세워진 높이45m의 6각7층 보숙탑
현재의 탑은 1933년 재건된 것
왼쪽 앞 철제울타리 안에 있는 탑머리부는 1997년 교체된 명나라 시대 만들어진 원래의 탑머리부.
유람선이 떠다니는 서호
서호를 남북으로 잇는 2.8km길이의 '소제'(蘇堤)
북송시대 정치가이자 시인/서가였던 '소식'(蘇軾;소동파)가 항주지사로 근무한 1090년에 연인원 20만명을 동원하여 만든 제방.
6개의 다리가 걸려있는 소제는 아침안개가 낀 봄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서호 한복판에 떠있는 섬 '삼담인월'(三潭印月)
1607년 토사를 매립하여 만든 인공섬으로 서호 유람선이 방문하는 곳.
밤에 유람선을 타고 호수면을 보면 달이 3개로 나뉘어진 것처럼 보인다해서 '삼담인월'이란 이름이 붙게된 것.
유람선이 떠다니는 사이로 삼담인월의 명물 석등이 보인다.
석등을 클로즈업해서 보면
1元짜리 인민폐 지폐 뒷면에 나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삼담인월로....
뒤로는 서호 동안 항주 번화가의 모습이 보인다.
서호십경의 제1경으로 불리우는 삼담인월
인공섬 안에는 연못이 있어서 연못 위의 구곡교(九曲橋)가 섬안에 점재된 사당과 사원을 연결한다.
구곡교와 선현사(先賢祠)
삼담인월에는 호수 안의 또 하나의 호수가 있다.
화항관어(花港觀魚)
소제의 남쪽끝에 있는 공원에는 꽃밭과 연못속에서 헤엄치는 비단잉어를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청나라 4대황제 강희제가 '화항관어'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고.....
청나라 4대황제 강희제가 강남순행 당시 이곳을 정비하여 세웠다는 '화항관어' 석비 뒤로 비단잉어들이 헤엄치는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화항관어는 호수 남쪽에 자리한 화가산(花家山)에서 흘러온 맑은 시냇물이 합류하는 곳으로 '花港'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것.
악왕묘 입구
소제 북단에는 남송시대의 명장 '악비'(岳飛)를 모신 사당 '악왕묘'(岳王廟)가 있다.
악비가 묘셔진 사당 '충렬사'(忠烈祠).
왕악묘는 1221년 남송시대에 창건되었으나 문화대혁명시 파괴되고 현재의 악왕묘는 1979년에 재건된 것.
악비의 상
악비상 뒤편으로는 악비의 삶과 업적을 묘사한 벽화들이 그려져있고.....
악비는 여진족이 건국한 금(金)에 맞서서 군대를 이끌고 고분군투하며 연전연승을 하며 활약했지만 여진과 화평을 주장한 재상 진회와 장준의 음모에 의해 무고하게 투옥되어 39세의 나이에 독살되었다. 21년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지금까지 구국의 영웅으로 모셔지고 있다.
악운(岳雲) 상
악비의 사당 좌우 양옆으로는 그의 부하장수였던 장헌과 그의 아들 악운을 모신 작은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악운 사당에 그려진 그의 활약상
악운은 아버지를 도와 함께 활약했지만 모함으로 아버지와 같이 독살되었다.
장헌(張憲) 상
장헌이 모함으로 잡힌 모습.
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고......
악비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 악비기념관
기념관 앞의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악비묘의 정원과 회랑
회랑에는 석비가 도열해있다.
악비와 그의 아들 악운(岳雲)이 잠들어있는 묘소
악비의 무덤 앞에는 실물크기의 동상으로 배신자 장준(張俊)과 만사설(万俟卨)을 포박당한 모습의 동상으로 재현해놓았다.
장준은 악비의 상관이었으나 부하 악비가 용맹을 떨치자 이를 시기하여 모함하였고 감찰어사였던 만사설도 진회와 짜고 악비를 모함하는 상소문을 올려 악비를 공격했다.
이들 뒤로 '문명관람, 침뱉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보인다.
한편에는 배신자 진회(秦檜) 부부가 같은 식으로 무릅을 꿇고있다.
배신자들은 지금까지 매국노로 두고두고 욕을 먹고있다.
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전당강(錢塘江) 변에 서있는 육화탑(六和塔)
8각7층의 불탑.
13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7층의 독특한 구조.
소지품 X레이 검사와 라이터같은 발화물질 검사를 거치고 탑을 오른다.
위로 올라갈 수록 계단 경사는 급해지고 좁아진다.
정상층 도달.
정상층 한가운데 건물을 관통하며 서있는 코어
정상층에서 내려다본 전당강 일대
바닷물의 역류현상에 의해 전당강은 수시로 범람했다고 한다. 이를 불력으로 잡기 위해 오월왕국의 전홍숙은 지원선사(智元禪師)에 명하여 불탑을 세우는데 이때가 970년. 그후 1121년 병란에 의해 탑은 파괴되지만 1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156년 탑은 재건되어 지금에 이른다.
모간산(莫干山)
항주에서 50여km 북쪽에 위치한 모간산은 해발 500여m의 고원지대로서 여름에도 서늘한 기후로 인해 별장지로 유명한 곳이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리 알려져있지 않지만 2000여년전부터 '강남제일산(江南第一山)'이라 하여 명산으로 일컬어졌던 곳이다. '대나무, 구름, 샘의 삼승(三勝)과 淸, 靜, 凉, 綠의 사우(四優)로 유명.
울창한 대나무숲으로 덮인 이 산은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의 대나무숲 격투신이 촬영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산속에는 이와 같은 대소 700여간의 별장이 있어서 상해, 항주, 남경을 중심으로한 장강하류 골든 델타지역 부유층의 여름휴양지로 유명하다. 모택동, 장개석, 주룽지 전총리, 베트남의 호치민도 이 곳에 머문적이 있었다.
무릉빈관(武陵賓館)
왕년에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피하기전 그의 별장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적당한 가격에 일반인도 묵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있다.
모택동의 별장
모택동 주석이 머물던 여름별장. 방문했을 적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침 폐관되어 있었다. 별다른 별장의 명치은 없고 그냥 #126이라는 넘버가 매겨져 있을 뿐이다.
장개석의 침실
장개석(蔣介石)과 송미령(宋美齡) 부부가 묵던 침실이 아직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개방되어 있다. 벽에는 장/송부부의 사진이 걸려있다.
장개석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떳지만 송미령은 100살 넘게 장수하여 2003년에 작고.
검지(劍池)
가물어서 폭포와 계곡의 수량이 영시원치 않았다. 때는 6월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