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고구려의 제20대왕 장수왕이 그의 부친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비. 동북아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금석문으로 높이 6.39m, 폭 1.34~2m의 석비의 사면에 세겨진 문자는 총1775자(풍화에 의해 판독가능한 것은 1600자정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광개토대왕'이란 명칭은 '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모두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고구려개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이 부친 고국양왕의 서거로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412년 사망시까지 그의 일생에 대해서 기술.
제2단은 재위기간의 공적이 8년 8조에 걸쳐서 기술되어있다.
395년에는 고구려의 북서쪽에 있던 패려(稗麗)로의 친정(親征), 396년에는 백제로의 친정으로 치세최대의 전과를 일궈내고, 398년에는 북동에 있던 숙진을 정벌. 400년에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하여 왜와 가야를 격퇴, 404년에는 왜와 전쟁, 410년에는 동부여에 친정. 여기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을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성과는 '함락된 성이 64, 획득한 마을이 1400'이라는 숫자로 기록되어있다.
제3단은 왕의 사후 왕릉을 지키기위해 동원된 가족의 이름이 나열되어있다.
또한 광개토대왕릉에 대해서 '장군총'과 '태왕릉太王陵', 2군데를 후보로 들고 있으나, 도굴로 인해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서 현재까지는 정확한 확인이 안되고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이 비문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1883년, 참모본부에서 중국으로 탐색지령을 받은 사카와 가게노부(酒勻影信) 라는 군인이 집안에서 비문의 탁본을 입수, 그것을 갖고 일본에 돌아가면서부터이다.
비문의 내용은 바로 해독이 되었지만, 비문의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일본, 중국, 한국 모두 드문데다가 특히 '신묘년'(辛卯年)의 부분에서는 일본에 의해 조작이 되어 일본의 한국식민지배를 정당화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도 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 일본의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은 부정하는 추세이다.
문제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의 문자가 풍화로 인해 판독불가하여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사이에 해석이 달랐다는데 있었다.
일본측의 해석은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로서 '□□'는 '임나(가야)'라는 설이다.
이것에 비해 한국(이북포함)측의 해석은 주어는 고구려로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공격했다' 혹은 '백제가 왜까지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토벌하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광개토대왕비에서 약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많이 손상되었지만 계단을 통해 상부의 대왕과 왕비의 관이 있는 석실까지 올라가 볼 수가 있다.
장군총(將軍塚)
내부는 모두 도굴되어 누구의 능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근의 연구결과 장수왕의 묘로 추측되어지고 있다.
장군총의 후면
능묘는 1100개가 넘는 화강암블럭을 높이 13m, 7단으로 쌓아세워졌다. 계단을 통해 내부의 석실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다.
장군총의 뒷편에 있는 작은 석분. 후궁의 묘소라고 한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시내에서 북으로 약 2.5km 떨어진 환도산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
고구려의 전형적인 산성으로 가장 높은 곳은 676m. 성벽은 둘레가 약 7km에 달하고 현재도 일부분이 남아있다. 성안에는 궁전터, 병영터가 남아있다.
산성하귀족묘지(山城下貴族墓地)
환도산성 아래쪽 입구에 있는 4세기이후 축성된 귀족들의 고분군으로 적석묘(積石墓), 봉토벽화묘등 다양한 종류의 고분이 수십기가 분포되어있다.
산성하귀족묘지
관람로 중간중간에 '뱀조심'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방문당시가 한여름이라 일대에는 정강이 높이로 풀이 자라있었는데, 관람로를 벗어나 어슬렁거리는 것은 주의를 요하는 것이었다.
환도산성에서 내려다 본 산성하귀족묘지
산성의 흔적이 옥수수밭을 향하고 있다.
동구고분군우산묘구(洞溝古墓群禹山墓區)
주로 6세기경에 조영된 고분군.
집안 고구려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적으로 집안 유적의 백미. 우리가 흔히 들어본 사신총, 각저총이 있는 곳이다. 얼핏보기에는 풀에 뒤덮힌 높이 4m정도의 고분이 펼쳐져 아무 것도 아닌 것같아 보이지만 내부의 석실에는 그 유명한 벽화들이 그려져있다.
동구고분군우산묘의 전시실
보존을 위해 석실내부로는 일체 들어가 볼 수는 없고 석실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원격조정 폐쇄회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입구로비의 TV에서 내부를 관람하는 것과 로비걸려있는 벽화의 사진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어차피 벽화사진은 인터넷이나 책자로도 볼 수 있는 것인데....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사진들.
벽화보존을 위해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고 별도의 전시실에서 사진만을 관람할 수 있다.
국내성지(國內城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시내에는 당시 성곽이 남아있다. 원래 성곽은 한쪽면이 2.7km인 정사각형이었으나 현재는 1~4m정도 높이로 집안시내에 북쪽과 서쪽면만이 남아았을 뿐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이북땅.
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
1958년에 완성된 집안시립 박물관으로 현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진열과 유적지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 곳.
국가수리풍경구 압록강(國家水利風景區 鴨綠江)
집안시내는 남으로 압록강을 면하고 있다. 강폭은 100m에도 못 미쳐보이는데, 물살이 좀 세서 그렇지 수영이 좀 되는 사람이라면 헤엄쳐서 건널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강에서는 유람선이 떠다니고 강을 따라 산책로가 나있다.
중국인민들이 강건너 북한땅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사진을 찍고 있다. 해가 떨어지면 불야성을 이루는 집안시내와는 달리 이북쪽은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의 세계로 돌변한다.
집안버스터미널(集安市長途客運站)
버스터미널 건물로 가운데 금색글자로 써진 곳이 매표소와 대합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승차장은 건물 뒤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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